조선왕조 500년은 선비정신으로 버텼던 나라였다. 여러 차례 국난을 당해 망하기 직전의 나라는 다시 살아나 무려 500년의 긴긴 세월을 견뎌냈었다. 그렇게 버텨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바로 조선민족의 선비정신이었다. 국난에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건져내야겠다던 선비정신, 자신의 몸보다는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선비정신, 못 먹고 못 입고 못 살아도 한 가닥 양심과 도덕성만은 버리지 못한다던 선비정신, 모두와 함께 살고 기쁨과 슬픔도 남과 함께 나누자던 선비정신이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으로 만들었고 나라가 그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때라고 모두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상류층의 지성인들은, 오늘처럼 돈만을 위해서, 권력만을 위해서 염치코치 없이 자기가 제일 잘났고 자기만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기지 않은 사람이 많았었다. 자기만이 반드시 권력자가 되어야 하고, 자기만이 가장 훌륭하다고 떠들면서 남은 모두 자기 아래로 보는 그런 몰염치한 사람이 오늘처럼 많지는 않았었다. 자기보다 학식이 높고, 인격이 훌륭하고, 덕행이 높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큰 벼슬이나 이권까지도 기꺼이 양보할 줄 아는 선비정신을 지닌 인물이 상당히 많았었다. 그것이 조선의 힘이었다. 조선시대의 그때로 가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선조 원년(1568) 8월 초하루의 기사에 퇴계 이황이 홍문관 겸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는 기록이 있다. “이황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 이때 박순이 대제학이 되자 이황은 제학으로 있었는데, 박순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높은 나이의 대석학이 다음 자리의 벼슬에 있고,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한 제가 감히 윗자리에 있음은 합당하지 않으니, 자리를 바꾸어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그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이황도 힘껏 사양하여 오래지 않아 다시 벼슬이 교체되어 박순이 대제학이 되었다”라는 조선 선비정신의 본체를 나타낸 기록이 있다. 대단한 일이다. 500년 조선사에 아름답고 멋진 역사의 한토막이다. 선조 원년은 퇴계 68세, 사암 46세의 시절, 박순의 양보가 없었다면 70세로 세상을 떠나는 퇴계의 이력에는 대제학이라는 그 찬란한 벼슬이 없지 않았겠는가. 정승의 지위보다야 아래이지만, 세상에서 알아주고 높이 여기는 벼슬이 대제학이었다. 그런 벼슬을 선배 학자에게 양보할 줄 알았던 선비 정치가 박순의 아름다운 행위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미화할 수 있겠는가. 오래지 않아 사양하고 양보할 줄 알던 선비 퇴계 때문에 박순은 바로 대제학에 오르지만, 이런 사양과 양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선비정신인가. 수억원을 공천헌금으로 상납하고라도 결단코 국회의원이나 시장 또는 군수를 해야겠다는 사람, 해묵은 정치적 이슈를 선거 때마다 들고 나와 지역민들의 갈등을 유발하는 사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사람, 자신이 경영하는 사업체를 위해 관직에 오르려는 사람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이 고관대작이 되어야 한다는 요즘 사람들과 그때의 선비들은 분명히 달랐었다.
벌써부터 다음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대한 바람이 불고 있다. 필자에게는 벌써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몰라도 낙선하고 다음 선거를 준비한 인물들에게는 지난 선거부터 지금까지 와신상담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와신상담의 시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와신상담의 시간들에 대한 그들의 내적인 감정과 생각이 발현되는 순간 필자는 그들이 강조하는 지역민들을 위한다는 각종 감언이설이 역겹기까지 하다.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냉정하게 판단하여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지역민들을 우롱하는 행태는 없어져야 한다.
정당 생활을 오래해서, 기초의원 광역의원을 거쳐 다음은 자치단체장이라는 어설픈 논리, 큰 표 차이 없이 낙선을 했기 때문에 재차 도전 등 이러한 자기만의 이유로 재차 지역민들을 갈등 속에 몰아넣는 사람들은 이제 지역 정가에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사암 박순의 아름다운 양보가 이런 시절에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대제학을 양보하니, 다시 또 대제학이 되돌아왔던 그때 일이 잊히지 않음은 웬일일까.
필자가 느끼기에 아직 멀고 먼 다음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지만 요즈음의 지역 정가를 보니 씁쓸함이 가시질 않는다.

서주원  jbk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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