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이  흔

본명 김형미. 197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0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시 당선,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과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이 있으며, 2011년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E-mail: hyeongmi6348@daum.net

▲청자 양각 물가 풍경무늬 주자

그 때, 나는 ‘거기’에 있었다. 천년을 훌쩍 넘어 ‘고려’라고 하는 시대적 과거 공간에 있으면서 동시에 현재에 있었다.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 머물러 있었고, 덜컹거리지 않으면서 덜컹거리고 있었다. 여름이 막 끝나가는 무렵이었고 가을이 시작되는 지점이었으며, 아아, 나는 그 아름다운 영혼과 눈 마주침을 하고 있었다! 그 떨림을, 나의 살아 있음을, 내가 되어버린 너의 영혼을 지금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삼복 기간 동안 세 번 피고 진다는 붉은 자미꽃이 다 져 내리고도 한 절기가 더 지난 무렵이었던가. 학예사 한정화 선생께 감히 부안청자박물관 수장고를 보여 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그녀는 여름 댓잎처럼 선선히 수장고 문을 열어주었다.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규성(奎星)이 밝게 비추이던 때이니 만큼, 나는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청도자들을 눈여겨보던 중이었다. 부안청자박물관이 개관되면서부터 무려 8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한 선생과는 평소 각별히 지내고 있던 터라 꺼내본 말이었는데, 선뜻 승낙을 받고 나니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

  부안의 고려시대 청자는 주로 12세기에서 13세기경에 제작된 것이 많다. 부안의 유천리 지역과 진서리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청자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무문의 청자부터 섬세하고 세련된 음각문양의 순청자, 구름과 학, 앵무새, 모란, 연꽃 등이 새겨진 상감청자에 이르기까지. 청자를 보려거든 태어난 혈처로서 가마터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지역들에서 조사된 가마의 청자 유물들은 유색이 회청색으로 발색되었든 회록색으로 불규칙하게 발색되었든 단아하면서도 고고한 기품이 있어 부안지역의 고려청자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수장고에 들어서자마자 도자 유물 특유의 흙냄새가 먼저 풍겨왔다. 그 냄새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누운 어느 먼 곳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동물의 뼛조각에 새겨진 갑골문처럼 알 수 없는 비밀한 메시지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뭉뚱그려 안고 박물관 수장고에 멈춰 있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다가가 관심을 보일수록 다양한 청자들도 말을 건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역력하게 눈 밝게 보고 귀 밝게 듣고, 그러면서 순간에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로 내게 말을 하고 있었다!

  동체 중앙 양면에 버드나무가 풍성하게 양각되어 있는 ‘청자 양각 물가 풍경무늬 주자’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생긴 모양 그대로 작고 둥근 자신만의 세상 안으로 나를 끌어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알이었고, 물방울이었으며, 따스한 흙 알갱이였고, 우주였다.

  나는 애벌레마냥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아 청자 주자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 또한 내가 되기 위해 몸을 늘여 내 안으로 들어와 주었다. 기면에 자잘한 유빙렬이 나타나 있긴 했지만, 황갈색 유색으로 인해 주자 안은 무척이나 따사로웠다. 작지만 단단하게 지어진 흙집 안에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곰곰 나를 궁글리면서 한참 동안 있었다. 한낮이 지나고 하루가 지났으며, 한생이 더 지나도록. 몇 겁의 생을 돌아 다시 전혀 다를 것 없는 나를 만나고 있는 것만 같아 숨 쉬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는 나의 살아 있음이 신비로웠다.

  동체 중앙 양면에 양각으로 장식된 버드나무가 내 몸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풍성하여서 한없이 ‘머물’고 싶었다. 잎 무성한 버드나무 줄기가 폭포수처럼 아래로 휘늘어져 있어 굳이 물을 담아내지 않아도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 주자. 물가를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암수 원앙새 중 한 마리는 얌전히 물의 흐름을 즐기고, 반대편의 또 다른 한 마리는 고개를 쳐들어 부리를 벌린 위용이 있다.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는, 가지를 꺾어 바로 꽂아도 살고 거꾸로 꽂아도 살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뿌리에 물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서 물 없는 곳에 버드나무를 심으면, 수맥이 생겨나 땅 속으로 물이 흐르게 된다고 한다. 해서 옛 여인들은 먼 길 떠나는 낭군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다. 이는 여인의 젊음은 오래가지 않으므로 청춘을 외롭게 보내지 않게 낭군이 빨리 돌아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해서 옛 사람들은 버드나무를 사랑하였다. 버드나무가 휘늘어진 모습도 흐르는 물과 같지 않은가. 원앙새와 더불어 부부금실 좋고 부귀를 누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양각화인 것이다. 실제로 이 주자에 차를 담아 마시면 아무 말 않고 있어도 마주앉은 이가 한 생을 산 것같이 정이 갈 것만 같다.

  곡옥의 형태에서 조금 더 자라 용의 면모를 갖춘 몸체의 손잡이가 어우러져 단순한 것 같지만 주자의 동그란 몸체를 충분히 부각시켜주고 있다. 아무런 문양이 없으나 주구의 곡선도 둥근 주자의 특징을 드러내는 데 한몫을 한다. 손잡이와 주구 접합 부분에는 능화창과 연잎 등의 장식으로 아름답다. 긴 대롱처럼 생긴 뚜껑의 촉 하단에 굵은 모래 알갱이가 붙어 있다.

입추

시원한 바람이 분다고 여름이 다 간 것이 아니고
꽃이 지고 말랐다고 그 나무가 죽은 건 아니다
구름에 해가 가렸다고 저녁이 된 것도 아니고
누군가 울었다 해서 슬펐던 것만은 아니다
청자 주자에 함께 차 한 잔 나누어 마셨다 해서
그 사람의 뼈 한 조각도 나눠가진 것 없듯이

  자기 소리를 진짜로 들을 수 있다면 남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했던가. 풀벌레들의 살림살이 돌아가는 게 전부 우리 생활과 같다는 것이 알아지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된다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 놓아도 내가 사라지지 않는 그런 길이 있다면, 나는 영원히 그 길을 걸으리라.

  청자 주자는 바로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나무들과 내 곁에 부는 저 바람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하여 최대한 가깝게 내 안으로 들어와 마음속으로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나는 분명히 있으면서도 너와 내가 없이 네가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네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이치를 알고 있기에.

  둥근 것들은 안으로 기운을 단단히 응축하고 있어 언제든 밖으로 뿜어낼지 모를, 작지만 강한 힘이 휘돌고 있다. 둥글게 몸을 말고 있다가도 한순간 늘일 수도 있고, 넓힐 수도 있는 무한성. 그것이 알이고, 그것이 나서 돌아갈 수 있는 처음 자리일 것이다. 전체 생명과 함께 드디어, ‘돌아가는 것’. 잠에 들며 슬퍼하지 않듯, 돌아감도 결코 슬픈 것만은 아니므로 기쁨으로 충만해서.

  이렇듯 ‘참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모른다 하니까 자꾸 시달리게 된다. 여름에는 모기에게, 겨울에는 추위에, 만나는 사람을 포함한 내게 와 있는 모든 우주의 질서에. 그 동안 무심코 지나치거나 혹은 아는 데 귀찮음을 느꼈을지도 모를 부안청자박물관의 유물들이 몇 세기를 돌아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진한 수장고 냄새가 배인 그 맑은 영혼들에게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서 나는 ‘거기’에 있어야겠다. 청자를 빚은 고려의 도공으로, 뜨거운 고려 가마의 불꽃으로. 가을 햇살이 꼭 저 누울 자리만큼 짧아져 있다. 근본에 놓아버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자신을 추슬러 고정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나 또한 ‘자신’으로, 돌아가야겠다. 나의 시작이며 끝이요, 나의 궁극이며 목적인 내 속의 나 혹은 네 속의 나와 함께. 그러한 영혼의 선택을 안은 채 그리고 좀 쉬어야겠다.

  뼈도 없고, 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어쩌면 그들 모두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지금도 나는 ‘그 때 거기’에 있고,

데스크 기자  jbk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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